▲ 서양화가 이경은 작가

어떤 순간, 많은 어떤 순간 그 낮:달의 세계가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꿈틀. 그렇게 암호가 되어버린 그림. 그 암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 또 하나의 암호가 된 무엇. 영원 속으로 익사한다. 그때의 미래가 현재가 되어있지 않다. 과거의 미래처럼 그럴싸한 꿈을 꾸어야 하나, 머릿속이 배회한다. 비린내 나는 슬픔, 그리고 허탈함. 숨처럼 거기에 있었다. 시간을 놓친 뒤에 거기에 있었다. 당신도 거기에 있었다. ‘있었던’ 것이 헝클어졌다. 현실로부터 분리된 일탈을 꿈꾸며, 익숙한 것들로부터 두리번거리며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지나간 것들이 전부 다 과거는 아니다. (작가노트 중에서)

자신만의 에너지 담은 표현주의 비구상 작품 선보여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색으로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서양화가 이경은 작가는 한 때는 ‘빨간에너지’의 작가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었다. 이 작가에게 있어 빨간색이란 ‘본질’을 드러내는 색이었다. 색을 나타내는 ‘color’ 라는 단어의 어원이 ‘빨강’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한다. 이 작가에게 작업이란 본질에 대한 탐색이며, 그런 이 작가에게 ‘빨강’ 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한다. 다른 색을 쓰다가도 다시금 되돌아오는 색이었고, 한마디면 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표현이었다고 한다. 다양한 색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비교적 소통하기 쉬운 소재로 표현해보려 하였으나 뭔가 포장해 놓은 듯한 어색함이 있었다고 한다. 작품을 앞세워 사람들과의 소통하기에 앞서 자신과 소통이 필요했고, 자신이 작가로서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 고민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작가의 ‘빨강’은 “천 가지 만 가지 표정으로 품을 파고들었고, 지금, 그녀는 ‘빨강’ 은 ‘정지’ 라고 말한다. 2013년, 이런 작품에 대해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이경은의 그림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이고 조금은 문학적이다. 숲과 풀을 바라보면서 예민한 감성을 뾰족하게 길어 올려 그것을 기술한다. 그린다는 것은 결국 쓰는 것이기도 하다. 문장이 아니라 붉은 물감과 붓질, 그리고 물감의 농도들을 달리해 캔버스 표면 위에 문지르고 밀고 나가면서 모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분위기는 결국 작가 자신의 내면풍경 같은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알다시피 그림은 문자가 멈춘 자리에 불구적으로 다가온다. 말더듬이가 되어 붓질과 물감은 캔버스 표면 위에서 머뭇거리고 떨다가 특정 색채를 칠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지우고 덮고 다시 칠한다” 고 평하였다. 그러던 중,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초록의 세계 표현하며 ‘집’ 에 대한 이야기 풀어내
철암그리기, 트라이앵글프로젝트 등 공공미술 진행 및 참여

이 작가는 2000년대부터 공공미술과 설치미술 등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다. 여러 지역의 지역성, 환경성에 관심을 가지고 교류전, 문화예술교육, 세미나 등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 참여 하였으며, 특히 폐광촌인 태백 철암을 중심으로 2002년부터 이어져 온 ‘철암그리기’를 비롯하여, 매년 세 지역을 선정하여 해당 지역을 답사하고, 지역작가 및 주민들과 호흡하며 지역의 역사, 환경적 특성을 토대로 창작활동 및 전시를 하는 트라이앵글프로젝트를 진행, 참여하였다. ‘철암그리기’는 그림을 ‘그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리워하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 작가는 작가들과 산처럼 쌓여 있는 석탄이 주는 거대함과 폐광이 주는 황폐함 등 동력이 멈춘 지역에서 삶을 이어가는 주민들과 예술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방식의 환경개선과 교육 등의 소통을 이끌어냈다. 이 작가는 지역미술은 지역주민의 삶과 분리되지 않은, 지역 주민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서울의 ‘문래동그리기’, 양평에서의 ‘두 강이 만나다’, ‘제비리, 할아텍을 만나다’ 등의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를 이어갔다. 그리고 2015년 이후부터는 초록의 색감으로 회화 작품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그 때의 ‘빨강’ 처럼 지금의 ‘초록’ 또한 이 작가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한다. “‘초록’은 돌아갈 수 있는 곳 또는 돌아가야 하는 곳, 즉 ‘집’을 말해요. 저마다의 넓은 의미의 집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우리의 삶 전체와도 맞닿아 있어서요. 삶과 그 삶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2017년,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 자리한 것, 표면 이면에 자리한 것을 중층적으로 쌓여 칠하고 덮어나가고 있다. 무수한 기억과 시간의 잔해를 덮고 또 덮는다. 집을 나서는 저 비정형의 발이 어딘지 슬프다. 정형화되지 못한 발,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마음이 닿아 있다. 작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 집을 떠나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발들에 대해 차분하고 무심함의 시선을 보낸다.” 고 하였다.

▲ 禁(금), 압착목화솜, 철사, 2017

북한강 설치작품 ‘108’에 자연으로 회귀 담아..
“더디게 가면서 서서히 자신을 완성해갈 터”

2017년 겨울, 양평 두물머리에 설치한 작품 ‘108’(백팔)은 이 작가의 작품세계에서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이는 이 작가 자신의 발 앞부분만을 하나씩 석고로 떠서 108점을 모은 작품들로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표현이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삶의 여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가는 “두물머리를 처음으로 답사하던 날, 순식간에 걸음이 불편할 만큼 눈이 쏟아져 내렸어요. 덕분에 느리게 걷다가 두물경 부근에서 희생된 요트부 대학생의 위령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이 그치고 1월의 북한강 바람이 매서웠지만 오랫동안 발이 멈췄어요. 우리 모두의 삶은 불완전하고 회귀와 소멸의 과정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소멸은 되돌아가는 것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북한강 얼음 위에 만들어져 얼음이 녹으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방식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담아내 호평을 얻었다. 그녀는 “2017년 전시에서 ‘영원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평면작업과 설치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더 나아가 ‘또 다른 희망을 꿈꾸는’ 작업으로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업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라며 또 다른 희망 하나를 꿈꾸었다. 이 작가에게 있어 작업이란 곧 ‘숨’이다. 일상의 삶이면서 자신과 또한 타인과의 소통의 방식이면서 자신을 견고히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지금 작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살면서 평생 동안 했던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예술가들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일상의 사람들과도 많이 눈 마주치고, 많이 듣고, 호흡하는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더디게 가더라도 서서히 내 자신을 완성해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올 가을이나 내년 초 쯤으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경은 작가의 미래에 ‘초록’ 의 따뜻한 빛이 비추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