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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을 위로하는 미술이 의미 있는 미술이라 믿는다”
안정희 기자  |  honesty5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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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8.26  09: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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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 조도연 화백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인류 최고(最古)의 미술작품으로 알려진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그림은 문자이자 언어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소통의 도구이자 종교적인 기원의 대상이었기에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며 향유하는 데에 비교적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이 향상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미술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과 유리된 ‘고급 미술’은 소수의 취미가 되어 미술은 이해하기 어렵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사치스럽기까지 한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미술이 다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미술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한국미술협회 이사이자 산내들미술교육원 원장으로서 다음 세대의 미술인들을 육성하고 있는 조도연 화백이다.

순수한 노력으로 성장한 경험이 제자를 길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 화백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울을 거쳐 지사장으로 내려가신 아버님을 따라 목포에서 중ㆍ고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행사로 화가이신 친척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시간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던 삶과 항상 사업으로 바쁘신 아버님의 대조된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워 왔다고 말했다. 남들은 조 화백을 천재라고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는 유명한 예술가들의 일화에서 흔히 언급되는 ‘화려한 재능’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계속 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려 냈으나 한 번도 입상하지 못했죠.”

그가 진로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 어린 시절, 이런 그를 걱정한 어머님과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평소 관심이 있었던 미술부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미술부를 맡은 선생님은 막 첫 학교에 발령되어 젊고 열정이 넘치는 선생님이었다. 조 화백은 미술선생님의 성실과 열정 속에 직접 레슨을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한 가지 큰 벽을 느끼게 된다. 미술부에서 같이 활동하던 다른 7명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미술선생님은 그의 이러한 고민을 알고, 한국에는 없었던 미술지인 일본의 데생 화집인 『아도리에(아뜰리에)』를 개인적으로 조 화백에게만 주셨고, 그것을 계기로 그에겐 새로운 일상이 생겼다. 모든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학교에 밤새 남아 그림 연습을 하는 일상이었다. 이는 후에 조 화백이 한국의 최초 데생 화집인 미대입시 월간지에 다작의 연재를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밤새 그림 연습을 한 후 창밖에서 떠오르는 해가 데생용 석고상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통해 명암을 연습했어요.”

조 화백은 이렇게 특별한 재능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미술 초심자에서부터 지금까지 올라온 경험이 오히려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미술은 대중과 소통하는 것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
조 화백이 본격적으로 화가 생활을 시작한 건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후 10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인사갤러리에서 진행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대기업에서 은퇴하여 회랑을 차리게 된 후원인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되기도 한다.
조도연 화백은 서양화가로서 수채화와 유화, 혼합재료 등으로 틀에 구애되지 않는 다양한 그림을 추구한다. 그의 그림에 큰 특징이 있다면 미술을 평소 즐기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그림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성과 사랑, 자연의 따뜻함과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당시 미술계 사조의 영향으로 10여 년 추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랑 소통하는 그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반영하여 조 화백은 일반 관객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추상적인 요소를 부수적인 요소로 활용하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추상화 사조가 지배하던 그 당시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중과 소통하며 서로 끌고 밀어 예술의 성취를 이뤄내는 것이야말로 미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19년에 열렸던 인사동 거리예술제이다. 미술관 밖으로 나온 미술작품이라는 콘셉트로 진행된 거리예술제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을 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술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예술가의 사회적 소명을 학생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었으면
조 화백은 자신의 그림이 따뜻하고 편안하며 긍정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경기침체와 기후변화,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비해 행복지수가 낮은 사회라는 점에 비추어 자신의 작품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술의 길을 가는 학생들에게 예술인이라고 해도 생업을 갖고 경제적 독립을 하는 등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예술의 가치가 희박해진 대한민국에서 대중과 소통하며 발전하는 예술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전달했다.
여기에 그는 더해 미래에 예술가가 성장해서 주도할 때는 모든 디자인제품의 저작권이 존중되어 그 수익의 60퍼센트는 디자이너에게 가고 40퍼센트는 파인아트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어떤 디자인이든 그 나라의 문화를 담아야 국제 경쟁력이 있는 법이며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파인아트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응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이 이러한 법을 가장 먼저 만들면 전 세계에서 디자인 강국으로 인정받아 우리 기업의 제품을 좋은 가격으로 수출하고 세계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래 세대의 예술가들은 예술은 본인의 만족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제와도 밀접하다는 것을 알고 예술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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