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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 겁외사
김태인 기자  |  red39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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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9  09: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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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외사 전경

성철스님은 생전에 산중으로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3천배를 시켰다. 노인이나 병자도 예외가 없다. 절은 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다. 동시에 마음도 낮춰진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백련암을 지키고 있는 원택스님은 이런 성철스님이 남긴 유산 3천배를 백련암의 전통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성철스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경남 산청에 위치하고 있는 겁외사는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성지이자 명소다. ‘가야산 호랑이’처럼 엄격하시면서도 제자가 지은 돌 섞인 밥을 묵묵히 드셨던 자상한 성철스님. 이에 생전 22년,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시적인 행복보다 영원한 자유와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부처와 같이 치열했던 성철스님의 구도적 삶과 생생한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 원택 주지스님을 만나 보았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던 성철스님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를 복구하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여 승가의 수행공동체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절연이속(絶緣離俗)이라는 그 출가적 삶의 지향점을 발원하고 몸소 실천해 나갔던 사람이 바로 성철(性徹)스님이다. 그는 미추와 신분, 선악과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 누구에게나, 기고 나는 모든 생명들 그 어떤 존재에서나 간직되어 있는 불성,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강조하고 이 불성에 눈을 띄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화두 참선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기 위한 몸짓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남 산청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성철스님은 속명은 영주(英柱),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까지 배운 뒤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늘 ‘영원에서 영원으로(From Eternity to Eternity)’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 의학, 문학 등 동서고금의 사상서를 두루 섭렵했으나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건네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깨닫게 되었다. 그 길로 지리산 대원사로 가서 서장(書狀)을 읽고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라는 무(無)자 화두를 들고 40여 일 동안 불철주야로 정진한 끝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고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이듬해 봄 범어사에서 운봉(雲峯)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4년 만인 1940년(29세)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칠통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시를 읊고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이루었으며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었다. 1947년 문경 봉암사애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을 만들어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였다.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이 결사는 한국불교의 종풍을 바로 세우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살리는 일로서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형식과 질서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통영 안정사 골짜기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고 머물렀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가치 아래 물 긷고 나무하며 씨 뿌리고 직무에 임했다.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절문 밖으로는 일절 나오지 않고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에 ‘성철불교’라고 하는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를 확립했으며 1964년에는 도봉산 도선사에서 청담 스님과 함께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세우고 서원을 발했다. 실달학원은 이 시대에 필요한 도제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사부대중을 위한 백일법문을 하다
성철스님은 1967년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동안거 중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하루 두 시간씩 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 종지는 돈오돈수임을 천명하고 현대 물리학 이론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밝히는 대법석이었다. 성철스님은 ‘열반경’의 말씀을 빌어 중도가 불성이라 하고 이 불성을 바로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했다. 그 견성은 즉 돈오(頓悟),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돈오 이후에는 닦을 것도 없다. 일초직입여래지다. 단박에 미세 망념을 모두 끊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극중죄를 지은 사람도 견성할 수 있다. 철저하게 주체(자아)를 폐기하는 화두 참선을 통해서 성철스님은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더불어 이를 화두 참선으로 실증하자고 설법했다. 26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무르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이며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던 그는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종단의 안정을 가져왔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삭발득도하고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그래이’라는 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큰 침묵 속으로 빠져드셨다. 세수 82세, 법랍 58년이었다. 성철스님은 속인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부처의 길을 태했다.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용기,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철저한 수행, 무소유와 절약의 정신은 바로 ‘우리시대 부처’의 모습이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 겁외사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겁외사는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지은 사찰로 성철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불필스님께서 산청군수의 제안으로 5여년의 세월에 걸쳐 2001년 3월 30일 창건한 사찰로 전국에 있는 8곳의 성철스님 문도사찰(門徒寺刹) 중 한 곳이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 밖의 절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은 성철스님에 의해 지어졌다. 스님은 만년의 몇 해 동안 겨울철이면 백련암을 떠나 부산의 거처에 주석하였고 그곳을 겁외사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그로부터 사명(寺名)을 딴 것이다.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돌기둥 18개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누각이 있다. 누각 정면에는 지리산겁외사(智異山劫外寺)라는 현판과 뒷면에는 벽해루(碧海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 즐겨 얘기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뜻)’라는 문구로부터 지은 것이라 한다. 누각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중앙에 성철스님의 입상을 비롯하여 커다란 염주·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동상 왼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내부 불단에 석가모니부처를 모셨으며,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려낸 성철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외벽 벽화에는 스님의 출가·수행·설법·다비식 장면 등이 묘사되어있고 대웅전 외의 건물로는 종무소·선방·요사 등이 있다.
또한 성철스님 동상 뒤편으로는 2000년 10월 복원한 스님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 이영주라는 속명으로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곳으로 모든 건물은 새로 건립된 것이다. 혜근문(惠根門)이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선친의 호를 따서 율은고거(栗隱古居)라고 이름붙인 안채, 오른쪽에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齊), 왼쪽에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 있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할 때의 방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가사·장삼·고무신·지팡이·친필자료·안경·필기구 등 스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평생을 오롯이 한 분만을 모셨던 성철스님의 제자, 원택스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고시 공부를 하던 무렵 고향 친구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은 건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71년의 일이다. ‘성철스님이라는 큰스님이 있으니 한번 만나 보자’는 친구의 권유에 그저 평생의 지남이라도 받아 볼 요량으로 방문했는데 그게 평생의 인연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호기롭게 꺼낸 말에 오기가 생겨 하루 동안 절 일만 배를 드리고 ‘속이지 마라’는 좌우명을 받았지만 기대 속 첫 대면에 받은 지남치고는 대실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지 말라’는 그 말이 ‘남들에게 속이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속이지 마라’라는 것을 깨닫게 된 원택스님은 자신의 몸이 화장당하는 꿈을 꾼 뒤 해인사를 찾아 참선을 할 수 있는 화두를 달라고 하자 ‘삼서근’(麻三斤)이라는 화두를 받았고 난생처음 받은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진하고 또 정진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1972년 새해가 밝고 원택스님은 문득 백련암으로 향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진전이 없어 성철스님을 뵈면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해결책을 얻기 위해 성철스님을 뵙자 “니 중 안 될래? 고마 중 되라”는 말 한마디에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었고 참선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출가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그였다. 대답을 못하고 방에서 나온 그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뒤척이며 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출가’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황당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틈이 생기기 시작한 마음은 둑이 무너지듯이 무너져 갔다. 그렇게 원택스님은 철수좌의 일곱 번째 상좌가 됐다.
힘겨운 행자 생활을 마치고 공양주와 시찬 소임을 보며 성철스님을 시봉하던 원택스님은 화두를 들고 몇 년 동안 참선에 정진했지만 상기병을 얻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도 호전이 되지 않자 원주 소임을 보며 행선을 정했다. 하지만 선승을 모시고 참선 공부를 하겠다고 출가했던 그이기에 참선을 할 수 없게 되자 참선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성철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하기로 생각을 했다.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해 100일간 설법했던 백일법문 테이프를 구해 들으며 기침소리, 웃음소리, 고함소리까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노트에 옮겨 적었다. 원택스님의 진정한 시봉은 여기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5년 동안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고 기록하는 일로 참선을 대신했다. 뒤늦게 성철스님이 그 사실을 알았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노여워했지만 그 일이 지금의 원택스님을 있게 했다. 그렇게 원택스님이 정리한 본지풍광(本地風光)-시중 유통은 ‘산이 물 위로 간다’와 성철스님이 직접 논술한 ‘선문정로(禪門正路)’의 초고가 완성되고 성철스님은 원택스님을 당시 불일암에 주석하고 있던 법정스님에게 보내 원고의 윤문을 부탁하자 법정스님이 흔쾌히 승낙했고 마침내 두 법문집이 출간되었다. 이에 성철스님은 “나도 이제 부처님께 밥값하였다”고 두 법문집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성철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성철스님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뵈었으니까요.” 원택스님의 시봉은 단순히 수발을 드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다른 ‘시봉’으로 남을 수 있었다. 원택스님은 성철스님의 ‘아난’이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듯 스승의 가르침과 삶을 대중에게 전하고자 ‘여시아문’하고 있는 것이다. 원택스님은 아직도 스승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도 성철스님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놓지 않고 있다.

끝나지 않은 시봉,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원택스님은 성철스님 열반 후에도 사리탑 조성, 진영과 존상 제작, 성철스님의 생가 복원, 성철스님의 유지를 선양하기 위해 백련불교문화재단 설립해 학술포럼 등을 개최하며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는 해인 2012년에 성철스님기념관 설계도를 완성하고 2015년에 개관해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성청스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다. 또한 불교인재원과 함께 순례단을 만들어 성철스님 수행도량 순례법회를 진행하는 등 성철스님의 흔적을 대중에게 알리는 불사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8년에는 남북불교 교류에 있어 주도적인 길을 연구하고 추진하고 있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남북불교 활성화를 위해서도 앞장서고 있다. “살아계실 때 그 기세에 눌려 숨 한 번 크게 쉬지도 못하고 그저 어른께 야단맞지 않고 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라고 살았던 그 세월이 너무나 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계실 때 좀 더 잘 모시고 많이 묻고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그저 어렵다는 생각에 도망치려고만 한 세월들이 너무나 무상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을 다해 시봉한다고 했건만 돌아보니 큰스님을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고 만나도 만나뵙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니 고마 중 되라’라는 성철스님의 한 마디에 한평생 강원(講院)도 선방도 못 가고 백련암에서 22년 동안 성철스님을 모시며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행복한 중 노릇을 했지만 도반(벗)이 없어 가끔씩 외톨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원택스님. 스승이 몸소 보여줬던 것처럼 수행승의 모습으로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원택스님을 통해 성철스님의 진정한 깨달음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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