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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송진우, 여운형(8월의 독립운동가)
백종원 기자  |  bridg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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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8.30  09: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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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이길용, 송진우, 여운형 [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동아일보의 대담한 일장기 말소
동아일보사는 1936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부민관(지금의 서울특별시의회)에서 구독자를 위한 올림픽 활동사진 상영회를 개최한다고 지면을 통해 공지하였다. 체육부 기자였던 이길용은 25일자 석간에 실릴 손기정 관련 기사에 사용할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입수하였다. 그것은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남선판(南鮮版)과 조선서북판(朝鮮西北版)에 실린 사진이었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이 무렵 이길용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회고가 있다. 요즘 표현으로 바꾸었다.
“저희(일본-인용자)가 세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진출하던 24년 전 마라톤으로부터 내리 마라톤에는 꼭 우승한다고 버티고 덤비다가 이루지 못한 숙망(宿望)을 우리 손 선수가 우승을 하고 나니 그제부터는 그다지도 낯간지럽게 ‘20여 년의 숙망 달성! 우리들의 손 선수 당당 우승!’ 이러한 제목이 일본어 각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꼴을 볼 때 어찌 민족적 충격과 의분이 없겠는가”
오랫동안 민족 차별을 하다가 손기정 선수가 막상 우승을 하니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우승으로 대서특필하는 모양을 도저히 참고 보기 어려웠다는 회고였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이길용은 화가이자 사진부 기자였던 이상범에게 사진을 넘기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흐리게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반면에 이상범은 이길용에게 일장기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악랄한 고문을 동반한 취조였기에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은 다반사였다.
경찰의 취조서가 남아있지 않아서 어떻게 장용서가 이길용과 이상범의 일장기 말소 사실을 알았는지 알 수 없다. 아직 신문이 발간되기 전이어서 지면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미 동아일보 사내에 은밀하게 ‘거사’ 내용이 돌아서 사실 확인차 장용서가 사진부실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용서가 막상 눈으로 보니 미흡하다고 여겨서 이왕이면 더 확실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을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진과장 신낙균과 부원인 서영호가 동의하고, 서영호가 실행에 옮겼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8월 24일에 발행된 25일자 석간 1판에는 일장기가 선명한 사진이 그대로 실리고, 석간 2판에 일장기를 지운 흔적이 선명한 손기정의 시상식 사진이 게재되었다. 석간 2판에 이어 바로 나온 25일자 조간 8면에 게재된 마라톤 입상자의 사진 속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의 일장기가 선명하게 인쇄되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독립운동가들
이길용은 1899년 8월 15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본적은 서울 종로 명륜동) 인천의 4년제 사립 영화학교를 거쳐 1916년 3월에 배재학당 본과를 8회로 졸업하였다. 대전역 개찰계에 근무하던 1920년 2월 29일 「대한독립 일주년 기념 축하경고문」을 동료에게 배포했다가 검거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에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가 1921년 6월에 출옥하였다. 이후 철도국에 복직하는 한편 동아일보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전 지역의 체육활동에 선수와 심판으로 참여했다. 1921년 9월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채용되고 1923년 3월에는 대전체육회 서무 겸 연구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대전의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6월부터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제물포청년회 회장을 맡는 등 인천의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관여했다. 1924년 가을부터 1927년 여름까지 조선일보의 특파원 기자이자 체육 전담기자로 활동했다. 1927년부터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면직될 때까지 동아일보에서 체육(운동) 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대한체육사』 집필에 몰두했지만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송진우는 1890년 5월 8일에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1906년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서 석 달간 수학할 때 인촌 김성수를 만났다. 1908년 11월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소꾸(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고 1909년 4월에 긴죠(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다. 1910년 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했다가 1911년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로 옮겨 1915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중앙학교의 학감으로 일하다가 1918년 3월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기획자 중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었다가 10월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21년 9월부터 1924년 4월까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는 동안 민립대학발기인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에 동아일보 고문, 1925년 4월 주필을 거쳐 1927년 10월부터 1936년 8월까지 다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직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12월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2월 30일에 암살당하였다.
여운형은 1885년 4월 24일에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무학당 등에서 배웠다. 1906년 양평의 묘곡리 자택에 교회와 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 곽안련 선교사의 조사로서 서울 승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1914년 말에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7년 봄에 교포들의 자녀를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1918년에 상하이 교포들의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을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12월에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11월에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 총사를 조직하였다. 1929년 7월 상하이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0년 6월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3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중앙일보(이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1936년 9월까지 재직하였다. 1942년 11월 일본 패전을 이야기했다가 체포되고 1943년 7월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8월 16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조선인민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주력하였고, 10월에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7월 19일에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이길용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송진우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여운형 선생에겐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2008년에는 해방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헌신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공로로 행정안전부 추천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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