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정 최은숙 문인화가

일찍이 중국에서부터 문인의 그림으로 발전해 온 문인화는 대부분 먹을 사용해 간략하면서 엷은 채색 기법을 보여주는 게 특징이다. 이 장르는 현대의 일반적인 화가가 아닌 문인들의 작품으로 사물의 외형을 꼼꼼하게 그리기보다 마음 속 사상을 표현하는 사의(寫意)적 성향이 강하다. 무엇보다 여백의 미를 드러내는 공간감과 글씨의 뜻을 읽어내며 바라보는 독특한 형식 덕분에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며 작가들에 의해 널리 칭송받고 있다.

부친의 권유로 서예에 입문, 35년 문인화 외길.
“먹의 색과 냄새에 빠져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부드러우면서 독특한 화풍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유정 최은숙 문인화가. 그는 전통 묵법(墨法)이나 준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우면서도 거리낌 없는 운필, 수사와 기교를 멀리한 채 표현의 과잉이 없는 솔직하면서도 명확한 필법을 구현해 가는 작가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서예학원을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로 25세 때 '먹'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음악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피아노를 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워낙 숫기가 없어 '이걸 하고 싶다'고 나서서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아마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처음 서예를 권해주셨을 때는 의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북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던 차에 처음으로 학원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평온을 찾았고, 새로운 조형과 색감이 점차 그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최 화가는 "지도한 선생님께서 어느 날 사군자로 대나무를 그리셨는데, 대나무 마디마디의 번짐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먹의 색감에 반하게 되었다. 붓을 대서 만들어내는 오묘한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부터 먹의 냄새와 색깔에 사랑처럼 빠져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에 교사인 언니도 서예에 조예가 깊어 서예에 발을 들인 최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서예관련 역사와 문화에 대해 깊은 연구도 수행하는 한편 이론과 실기를 겸비해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그림, 글씨와 함께한 세월이 35년째. 하지만 이 길은 그에게 있어 멀고도 험준했다. 그럼에도 최 화가에게 문인화는 반복되는 일상의 좌절과 아픔 속에서도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자와 같았다.

다양한 자연물이 한 데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
‘심도 있는 탐구로 자신만의 문인화 세계 구축’

사실 문인화는 먹으로 그리기 때문에 대부분 흑과 백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언뜻 단조로워 보일 수가 있다. 작가가 이를 의식하고 잔잔하면서도 넉넉하고 포근한 여백의 화면 구성과 맑은 기운이 감도는 담채(淡彩)를 속되어 보이거나 가볍지 않고 깊이 있게 구현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최 화가는 이에 대한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작품 안에서는 꽃과 자연,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흥취를 선사한다. 달팽이를 소재로 한 '느린 세상살이', 부엉이를 소재로 한 '응시', 물고기가 노니는 '유희' 등 다양한 작품은 기존의 세계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화가의 안목을 느끼게 해준다. 한국적인 미의 한 양식으로 소개되는 ‘여백의 미’ 란 어감이 다소 관습적이기는 하나, 그의 작품을 보면 무엇보다 그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개인전을 통해 가장 최근에 선보인 작품 중 '꿈속에서', '강가에서', '봄소식' 등은 이러한 가치가 잘 드러나 있는 역작이라 할 만 하다. 흐릿한 나무의 표상이 마치 추상화인 것처럼 화폭 안에서 어우러지며, 나무로 이루어진 숲과 강, 꽃잎이 한 폭의 그림 안에 들어있는 작품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그의 작품 세계 핵심 요소이다. 최 화가는 "문인화는 회화적인 공간성과 조형적인 틀, 그리고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그림 양식이다. 저의 그림은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언급했다. 최 화가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글씨다. 그만의 독창적인 캘리그래프 형식의 글씨체는 작품 속에 화제(畫題)를 함께 사용하여 그림 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풀어낸다. 그가 인용한 호산 박문호의 <병아리> (앞뜰의 향기로운 풀 봄 마음에 부드럽고 / 정원을 덮는 그늘 늦여름을 알리누나), 백운거사 이규보의 <춘일방산사>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햇볕 시끄러운 새 소리 / 수양버들 그늘 속에 반쯤 열린 문) 등 다수의 싯구는 짙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작가의 심도 있는 탐구와 센스 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파리 등 해외전서 독창적인 아름다움 인정받아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며 작품 만들어 갈 것”

최 화가는 2007년을 필두로 최근까지 2년 터울로 개인전을 가졌다. 그간에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파리루브르박물관, 두바이아트페어, 상하이아트페어 등에서 작품을 알렸고, 특히 해외 평단에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전에 비해 작품 발표 주기가 더 짧아진 건 삶에서 얻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최 화가는 "사실 국내에서 문인화 입지는 결코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예술을 일찍부터 접한 해외 관객들은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쉽게 받아들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해외 전시에서는 작품이 많이 판매 되었고 꾸준한 호평으로 어려운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어줬다"고 밝혔다. 최 화가는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발견하고 붓을 잡는 것이 창작의 시초이자 비결로 꼽았다. 그는 "글씨와 그림을 함께 하다 보니 중요한 차이점을 알게 됐다. 글씨는 마음이 복잡할 때 붓을 잡으면 시름이 가라앉고 마음이 가다듬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그림은 그렇지가 않다. 가장 차분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기에 일상의 조화로운 삶처럼 이를 추구하며 여유를 갖고 작품을 해 가고자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최 화가에게 있어 작품은 일상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면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와 다름없다. 담백하고 빛 고운 작품을 해가는 이 시대 문인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소통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