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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알 애비슨, 로버트 그리어슨,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9월의 독립운동가)
백종원 기자  |  bridge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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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9.27  17: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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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버 알 애비슨, 로버트 그리어슨,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은퇴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도운 선교사: 올리버 알 애비슨
애비슨(Oliver R. Avision)은 1860년 6월 영국 요크셔주에서 태어나, 6세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여 온타리오주에서 성장하였다.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모교의 의과대학 약리학 강사로 활동한 그는 1892년 선교사로 지원하여 그해 6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서 부임하였다. 그해 11월 초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고종의 시의를 겸했다. 1899년 제중원 안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했고, 1900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의료선교 후원을 호소하여 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로부터 1만 불을 지원받았다. 그 기부금으로 제중원을 신축 이전하여 1904년 9월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도 바꾸었다. 1916년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그 교장도 겸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세브란스병원에는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넘쳐났다. 애비슨은 3.1운동의 부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헌병경찰의 가택 수색과 환자 이송에 저항하고, 항의하였다. 애비슨은 한국에서 선교를 해야 하는 한 공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진심으로 한국인의 독립을 바랐던 선교사이다.
애비슨은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되었고, 선교사에서 은퇴하여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미국에 귀환해서도 1942-1945년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총무 겸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우리 정부는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56년 8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 피츠버그에서 96세로 별세했다.

성진 3.1운동을 후원한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은 1868년 2월 15일 캐나다 노바 스코셔(Nova Scotia)주 헬리팍스(Halifax)에서 태어났다. 부인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함께 1898년 9월 7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9년 2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 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1901년 5월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했다. 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2년 간도(間島)와 해삼위(海蔘威) 지역까지 여행하며 성진을 비롯한 관북지방과 동만주 일대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는 이동휘(李東輝)가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기꺼이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임명하고, 1년 후에는 조사(助事)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그는 성진지역 3.1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도왔다. 그는 1919년 3월 7일 저녁 성진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7월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가 1921년 3월 세 딸과 함께 돌아와 성진선교지부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회령, 성진, 해삼위를 관장하는 함북노회 부노회장에 피임되었다. 1935년 정년퇴임 후 귀국하여 토론토(Toronto)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5월 8일 98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감사패까지 받은 선교사: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은 1870년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세인트존스(St. Johns)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미국인 부인과 함께 캐나다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1913년에 개설한 용정선교지부에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였다.
1916년 이 용정지부에 의료선교사로 마틴 부부가 부임함으로써 용정지역에서도 의료선교가 시작되었다. 1918년에 새로 건립된 제창병원(濟昌病院, St. Andrew Hospital)은 30개의 병상을 갖춘 현대식 건물로 남녀 입원실과 수술실, X선 촬영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에서 만세시위대는 「정의인도」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돌진했다. 만세시위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은 모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병원장 마틴은 사망자의 시체는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하고,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고,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이러한 일 후에도 마틴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지와 협조 속에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이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마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감사하여 간도 대한국민회는 1920년 2월 이를 표창하는 기념패를 제작하여 그에게 수여하였다.
1920년 10월 용정의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던 마틴은 일본군의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병원 간호사와 함께 1920년 10월 말경 일본군의 방화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사진을 촬영하고,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군의 학살 만행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마틴은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임지를 서울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결핵병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언론에 기고하거나 강연 저술을 통하여 보급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가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미국과 영국 영사관은 선교사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철수를 강력하게 권고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민 철수를 위해 마리포사호(The Mariposa)를 인천항에 보내 11월 16일 마틴과 부인을 비롯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진 219명을 싣고 한국을 떠났다. 그는 부인과 함께 거주하던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Richmond)에서 이듬해인 1941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8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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