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함영순 추상화가]

영산강 드들 강변 마을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내 감성을 키우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강을 건너고, 사계절 변화하는 들판을 가로질러 학교 가는 십리 길은 자연의 정취를 느끼고 섭리를 터득하는 시간들이었다. 그 소중한 기억과 경험들이 나의 내면에 자양분이 되어 작품에 고스란히 발현되었다. < 작가 노트 중에서 >

‘빛의 노래’ 시리즈로 거듭난 ‘빛과 색의 언어‘ 작품.
함영순 작가가 지난 6월 15일부터 30일까지 광주 <생각상자 갤러리>에서 ‘빛과 색의 언어’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앞서 열린 광주·전남여성작가회 정기전과 맞물린 시기였다. 6월 19일 오전, 기자가 수서역에서 SRT로 출발해 11시 30분 광주 송정역에 도착할 무렵은 섭씨 34도. 뙤약볕에 무더운 날씨였다. 한센병원 옆에 자리한 <생각상자 갤러리>에 도착하니 사전에 약속했던 함 작가가 반갑게 맞이해줬다. 첫인상이 수더분하고 말씨도 무척 정감 있는 작가였다. 갤러리에 들어서니 작가가 풀어낸 자연의 색과 빛, 내면의 심상을 표현한 작품 30여 점이 걸려 있었다. 방명록 싸인을 보고 그사이 지역의 여러 인사와 유명 작가들도 많이 다녀갔음을 짐작케 했다. 멀리 파주에서 찾아온 이는 이미 몇 점을 찍어 판매 완료되는 등 반응도 매우 뜨거웠다. 작품은 <빛의 노래>가 꽤 많았다. 한 작품은 봄날에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걷다가 만난 진달래의 합창에 걸음을 멈추게 만들어 그 느낌을 담아냈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함 작가만의 수직 추상화 시리즈가 탄생되었다. “봄빛의 찬란함, 봄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을 구상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포괄적인 추상화로 했어요. 진달래와 철쭉을 사진 찍어 보고 그리는 것보다 철쭉이 빽빽하게 핀 색채 자체로 합창이나 함성이 되는 의미 이전의 조화로운 소리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외에도 햇볕에 반사되는 정감어린 땅, 들판을 가로질러 냇가에 발 담그고 초록 숲에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릴 것 같은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색채와 빛, 소리로 빚어낸 아름다운 추상작품들이었다. 작품은 한지, 아크릴 등 혼합재료로 완성됐는데 전체적으로 환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땅과 숲 자연의 심상이 실내에 시원하게 펼쳐졌고, 잔잔히 휘감는 클래식 음악에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도 충분했다.

▲ [사진 = 함영순 추상화가]

‘자연은 나의 스승’, 드로잉에 적용하며 끊없는 연구.
함영순 작가는 어린 시절 영산강 근처에서 자랐다. 그이는 그 시절 학교 가는 길이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했다. 매일 먼 길을 걸어 다니며 강렬한 태양 빛과 바람, 눈보라, 야생화와 풀꽃을 보았다고 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드들강의 보를 맨발로 건넜던 느낌과 변화하는 자연 속을 걷던 소녀의 마음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듯했다. 지금의 작품들은 곧 어린시절 느꼈던 감성이 자양분이 되었고, 오늘로 이어진 것이다. 함 작가는 전남대학교 사범대 미술교육과를 나왔다. 학부 시절 그이는 여타 대학과 달리 미술교육과는 첫 회라 마땅히 선배가 없었다, 고심 끝에 함 작가는 ‘사다리’ 동아리를 창립해 토론과 연구에 몰입했다. 미술동아리는 함 작가의 전남대 동기들과 조선대 선배의 연합체로 미대생 중에서 학구열이 대단한 친구들로 구성되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던 동아리였다. 이들은 새로운 미술사조가 전개되기에 깨어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다. 더불어 광주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취지를 내세우며 중요한 이슈를 만들었다. 그렇게 열정적인 학부 시절을 마친 함 작가는 미술교사로 완도로 발령나 그곳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성한 곳이 광주. 여기서 광주·전남여성작가회 활동으로 작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에 더욱 몰두했다. 누드 크로키 모임 활동도 했다. 특히 인체 드로잉(크로키)에 색채를 더하기까지 했다. 크로키는 보통 연필만 사용하지만 함 작가는 확장성 있는 예술로 색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크로키 모임에선 규정에 어긋난다고 눈총을 받아야 했다. 회원의 크로키 모음집이 나올때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흑백처리 된 결과물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예술 세계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단자 같이 숨막히는 제한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시도하고자 했던 함 작가는 그렇게 다른 작가들이 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색채로 자신만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 [사진 = 함영순 추상화가]

빛이 곧 색채, 다양한 시도로 추상작가 반열에 올라
현대에 이르러 회화를 ‘색채 예술’이라고 빚대어 말한다. 색은 작가의 감정과 생각을 실은 시어(詩語)나 다름없다. 색을 통해 작가는 내밀한 언어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함영순 작가는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다양한 색들을 서로 중첩하고 함축된 색채 언어로 단순화시킨다. 남도의 밝은 빛과 소박하고 투박한 자연에서 체득된 경험과 기억들을 다양한 질감과 색채, 비형상적인 형태로 녹여서 작품으로 발현하고 있다. 그이의 작품을 대하면 언뜻 색의 혁명을 일으킨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 영혼에 영감을 주는 색 추상의 대가 ‘마크 로스코’, 색 실험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한국의 옛 화가 ‘유영국’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의 ‘마리 로랑생’이 황홀한 색채로 유명하다면, 함영순 작가는 사물의 형태보다는 아름다운 색채와 빛, 느낌이 어우러진 추상의 반열에 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 [사진 = 함영순 추상화가]

지난 기간 작품을 살펴보면 그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얘를들면, 봄길(2014년), 세량지의 봄(2015년), 들길에서(2014년), 향기(2018년), 속삭임(2018년), 가을(2016년), 만추(2021년), 산길(2022년) 등 일련의 작품이 그렇다. ‘가을’ 작품은 마치 ‘마리 로랑생’을 보는 듯 아름다운 색채가 화폭을 가득 채운다. 사실 함 작가는 구상도 했었다. 세월의 흐름에 사유가 더욱 깊어지고 누구보다 색과 빛에 대한 많은 고민과 연구에 더 매달렸다. 세상을 내려놓고 작업실에서 캔버스를 마주하고 ’무엇을 그리지?’ 막막하게 바라보고 색채 실험을 하다 자연의 감흥이 저절로 드러났다고 했다. 함 작가는 이런 감정을 정지된 화면에 고정시켰다. “형태의 의미보다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런 과정에서 추상이 되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이지요.” 함 작가는 자연에서 느낀 감흥이 잘 표현될 때까지 덧칠하고 덧칠하는 색의 중첩을 통해 “바로 이런 느낌이었어”라고 자연의 향연이 느껴질 때야 비로소 붓을 놓았다. ‘빛을 색채로, 바람을 터치로!’ 빛과 색, 자연의 언어가 버무려진 작품들은 그렇게 밀알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함 작가가 추구하는 앞으로의 작품 행보에 귀추가 더욱 모아질 것으로 보여진다.